겨울이 오기 직전의 바람은 늘 살갗보다 기억을 먼저 파고들었다. 해가 채 저물기도 전에 차게 식어버린 공기 사이로,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낡은 간이역의 풍경이 떠올랐다. 그곳에는 끝내 주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차가운 나무 벤치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푸른 목도리 하나가 있었다.
기차 소리에 묻혀버린 마지막 말들
그 시절 우리는 서툴렀고,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만 급급했다. 상대방이 건네는 침묵의 무게를 헤아릴 줄 몰랐으며,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마치 패배처럼 여겼다. 마지막 기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던 순간까지도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서늘한 원망뿐이었다.
그것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였다. 성에 낀 차창 너머로 서서히 멀어지던 실루엣을 바라보며, 금방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에 고개를 돌려버렸다. 하지만 삶에서 어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와 영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만다.
되돌아간 승강장, 멈춰버린 시간
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은 기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한참이 지나서였다.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후회를 이기지 못하고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도록 플랫폼으로 되달려갔을 때, 승강장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. 오직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, 누군가 깜빡 잊고 두고 간 듯한 파란색 털실 목도리만이 차갑게 식어가는 벤치 모서리를 지키고 있었다.
물건에 깃든 사람의 체온은 생각보다 빠르게 증발한다. 손끝에 닿은 올 사이로 스며든 냉기는, 그 자리에 머물렀던 다정한 배려를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가장 아픈 통증이었다.
전하지 못한 배웅이 남긴 긴 여운
목도리를 가슴에 품고 돌아오던 밤, 세상의 모든 가로등은 유독 시리게 반짝였다. 미안하다는 한마디, 고마웠다는 짧은 인사조차 제때 건네지 못한 채 떠나보낸 기억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렀다.
시간이 흐른 지금도 첫눈 냄새가 섞인 찬 바람이 불어올 때면 그 낡은 간이역의 플랫폼이 떠오른다.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남겨진 마음만이 여전히 벤치 주변을 서성인다. 그때 그 목도리를 제대로 둘러주었더라면, 우리의 마지막 계절은 조금 더 따뜻했을까.